원광대학교 통일교육사업단

Uedu of Wonkwa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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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평화다 _원광대학교 교육학과 이미종교수님

원광대학교 통일교육사업단/2024년 6월 1일-2일

 

 

통일은 평화다 : 철원 DMZ 평화여행을 다녀와서

 

이미종(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철원은 서울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서울에서 30여 년간 살았어도 철원에 가볼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철원은 나에게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철원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요즈음 철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에 대하여 관심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2년 전, 사찰 순례로 철원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가봤다. 도피안사와 심원사와 원심원사라는 사찰이다. 나는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면서 이 지역이 특별한 역사를 가진 지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철조비로자나불은 도선국사가 제조한 것으로 이 절을 비보국찰 중의 하나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도피안사라는 절 이름은 철조비로자나불이 스스로 영원한 안식처인 이곳 피안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철조비로자나불이 국보로 지정되었다면 도피안사는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상당한 의미를 지닌 사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에 비하여 겉으로 드러난 사세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철조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작은 전각(대적광전)과 그 앞에 덩그라니 서있는 삼층석탑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도 있고 삼성각, 범종각, 일주문 등 사찰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골격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도피안사는 10분이면 충분히 사찰 경내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피안사는 남북 분단의 아픔을 겪으면서 종교를 아편에 비유하는 공산 치하에 있다가 6.25 전쟁으로 완전 소실되었다고 한다. 만약 철원이 국군의 피나는 노력으로 남한 땅으로 편입되지 않았다면 도피안사는 물론 철조비로자나불도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다행히도 철원은 수복되었고 도피안사 역시 1957년 육군 제15사단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철조비로자나불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간인 통제 구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철조비로자나불을 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민간인 통제 구역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사찰 관리권이 민간으로 이관되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도피안사에 가서 철조비로자나불을 친견할 수 있다. 도피안사와 철조비로자나불은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존속과 소멸의 갈림길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존속의 길에 들어섰다. 덕분에 나 역시 우리나라에 얼마 남지 않은 철조비로자나불을 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심원사와 원심원사도 둘러봤다. 모두 6.25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사찰들이다. 심원사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기 직전에 창건되어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6.25 전쟁 이전까지는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심원사는 6.25 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게다가 민간인 통제 구역에 위치해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그리하여 소실되지 않고 남은 부도와 비석 등을 모아 철원에 심원사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였다. 철원 심원사가 바로 그 사찰이다. 원심원사는 6.25 전쟁 때 완전히 전소된 심원사 소재 지역이 민간인 통제 구역에서 해제되면서 다시 조성하기 시작한 사찰이다. 나는 사찰을 둘러보면서 두 사찰 모두 6.25 전쟁의 아픔을 딛고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또 언제 이 먼 곳을 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이 근처 어딘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었겠지, 지금도 전쟁을 대비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이 근처 어딘가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초를 서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을 떠났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는 철원이라는 땅을 6.25 전쟁, 사찰의 전소와 재건, 민간인 통제 등등의 단어를 떠올리면서 아픈 기억을 가진 지역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철원은 다시 나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단지 철조비로자나불만 기억 깊숙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것을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24년 6월 1일, 철원이 다시 내 앞에 선다. 이순(耳順)을 넘기면서 나는 앞으로의 시간을 직장 생활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원광대학교 사범대학이 통일교육원에서 주관하는 통일교육선도대학에 선정되면서 통일교육과 관련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사실상 우리나라처럼 분단된 국가에서는 통일교육이 필수 교과목으로 지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교육은 정권에 따라 목적도 내용도 달라진다. 무엇이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서는 통일에 대한 열망은커녕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최선의 방책이다.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소수의 국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는 듯하다. 통일은 대부분의 국민들의 관심사 밖의 일이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통일은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독일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천문학적 숫자의 통일 분담금을 자기들이 부담해야 하니 말이다.

나는 몇 년 전까지 도덕윤리교사 자격증 취득의 필수교과목인 ‘통일교육론’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이때 나는 강의 초반에 통일을 거부하던 학생들도 분단과 관련된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통일을 염원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일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분단이나 통일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이해할 경우 손해 보는 사람들이 있고, 손해 보는 바로 그 사람들이 통일교육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통일교육은 영 교육과정인 셈이다. 그런 만큼 내가 통일에 무관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분단과 관련된, 또는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활동을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기회가 왔다. 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아니 나의 시간을 만들어서 또는 나의 건강을 관리하면서 원광대학교 통일교육사업단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DMZ 평화여행’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학기 말이라서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철원으로 출발했다. 4시간 이상이 걸려 철원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역사문화공원 한 켠에 덩그러니 서 있는 노동당사 건물이다. 현재 수리 중이라서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지만, 가림막에 건물 크기의 사진이 붙어 있어서 노동당사 원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노동당사가 철원에 있다는 것은 6.25 전쟁 이전 철원이 북한 관할 지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닌게 아니라 철원 노동당사는 1946년 북한 노동당이 철원과 그 인근 지역(김화, 평강, 포천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소련식 건축공법으로 지은 3층 건물이지만 러시아 건축보다는 간소하고 단순하다. 특히 수직·대칭적 구조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노동당사로서의 권위를 잘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북한에서 철원에 노동당사를 지은 것은 철원이 그 만큼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북한 지역으로 편입되기 이전, 즉 일제 강점기에 철원은 10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인구수로 환산하면 30~50만명 정도 되는 숫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현재 익산보다 큰, 전주 정도 규모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인구가 많았던 것은 그곳이 평야 지대이기 때문이다. 철원 인근에서는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 농산물을 관리하고 보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설물들을 지었다.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남아있는 ‘농산물 검사소’, ‘얼음창고’, ‘제2금융조합’ 등이 이 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철원역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과 물자들을 실어날랐을 것이다. 물론 철원을 포함한 이 지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수탈하여 원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실어날랐을 것이다. 곡창지대 호남 평야의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하여 실어날랐듯이. 그러나 오늘날 철원의 인구는 4만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때 번창했던 큰 도시가 작은 마을로 변해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38도선이 그어졌을 때 북한 관할 지역이었던 철원이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남한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고, 철원 노동당사 역시 남한 지역에 남게 된 것이다. 현재 노동당사는 가림막으로 가려있어서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철원 노동당사는 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노동당사인 만큼 원래 널리 알려진 유명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철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남한과 북한이 전투를 치열하게 하는 과정 중에 포탄을 맞아서 여기저기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있다. 1층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지만 2-3층은 앙상한 외벽만 남아있다.

1960년대 미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무기 경쟁을 하던 냉전 시대에 노동당사는 전쟁과 반공의 상징물이었다.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1990년대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면서 노동당사는 평화와 희망의 상징물이 되었다. 노동당사 앞에서 KBS ‘열린음악회’도 열리고 ‘발해를 꿈꾸며’라는 뮤직비디오도 촬영되었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곧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남한 사람 중에는 북방 진출을 통하여 대제국을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무너지지 않고 핵으로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평화를 말하지만, 여전히 북한 흡수 통일을 꿈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20년대 노동당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점심 식사 후 민간인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가 전망대에서 비무장지대를 보기로 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전망대로 들어가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그 중에 외국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이 왜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이곳을 방문했을까? 단순한 여행용 관광일까? 아니면 한국전쟁의 상흔에 공감하고 함께 치유에 동참하기 위해서일까?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부는 유행이 있단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다. 체르노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나 재해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지만 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유행했다고 한다. 노동당사 건물도 그러한 여행지 중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단다. 포탄 맞아 부서진 흔적들이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야생화들이 자라게 되고 그것이 나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폐허미’라고 말할 수 있다. 2020년대 철원 노동당사는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그 자체로 또다른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앞에서 본 외국인도 그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철원에 1박 2일 머물면서 나는 전쟁과 세월이 가져다 준 아픔과 선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가 다소 높은 곳에 있다는 의미이다. 남한에서는 높은 빌딩이 보이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골짜기에도 리조트나 호텔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 철원에서는 높은 건물을 볼 수 없다. 얼마 전에 모내기를 마친 논과 비닐하우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뿐이다. 해설사는 모노레일을 타면서 여기가 곧 알프스라고 말한다.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자연이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비무장지대로,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더라면 평야 지역인 철원에 아파트와 남북을 잇는 도로 위 자동차로 가득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전망대는 군사분계선 바로 앞에 있다. 남한군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들이 보인다.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젊은이들이 보초 서는 일은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기보다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아깝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맘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체력을 가진 젊은이들이 저기서 저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망원경으로 인민기가 펄럭이는 북한 초소도 보인다. 저기에서도 북한 젊은이가 남한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겠지! 남한 젊은이는 그래도 1년 6개월이지만 북한 젊은이는 10년이라고 한다. 20대를 모두 군대에서 보내는 것이다.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자연경관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작은 산봉우리 사이로 넓게 펼쳐진 평야 지대에 산림이 울창하다. 비무장지대라서 군인들의 발길도 닿지 않는다. 동물들에게는 바로 이곳이 천국일 것이다. 이 또한 전쟁과 세월이 준 선물인 듯하다. 우리는 이 선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소중하니 오랜 동안 간직해야 할까? 내가 받고 싶어서 받은 선물이 아니니 필요 없다고 버려야 할까? 이 선물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면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 선물이 오래오래 간직되기를 기원한다. 그렇다고 분단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분단이 지속되지 않으면서도,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보초를 서느라고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으면서도 이 선물을 간직하는 방법을 찾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요즈음 북한에서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는 것은 탈북주민단체에서 그들이 질색하는 내용을 담아 북으로 풍선을 날려 보냈기 때문이다. 남한 정부에서는 ‘표현의 자유’ 운운하면서 이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한다. 이전 정부에서는 법을 제정하여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경선 평화학교 교장선생님(정지석 목사님)께서는 남북에서 서로 풍선을 날려 보내는 것은 군사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높이는, 매우 위험한 행위라고 우려를 표하신다. 군사 무력 충돌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전쟁은 우리나라를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처럼 만들 가능성이 크다. 끔찍하다. 저녁 늦은 시간과 아침 이른 시간, 북한에서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고 있으니 발견 즉시 군에 신고하라는 문자가 뜬다. 안타깝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런 일을 자주 접하다 보니, 우리는 북한의 존재에 대해서도, 전쟁의 위험에 대해서도 버릇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르다.

이틀째, 우리는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전에는 비무장지대였지만 유엔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을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진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우리는 그곳에 조성된 ‘생창리DMZ생태공원’을 탐방하기로 했다. 생창리DMZ생태공원에 들어가기 전에 ‘김화이야기관’에 들렀다. 여기에는 지금은 사라진 마을, 김화군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현재 생태공원이 위치한 ‘생창리’는 현재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김화읍 소속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6.25 전쟁 이전에는 김화군에 소속되어 있었단다. 일제강점기에는 철원에서 시작한 금강산 전기철도(전철)가 김화읍을 지나가면서 금강산을 관광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김화읍을 지나쳤다고 한다. 김화군은 당시 인구 10만을 자랑하는 번화한 곳으로서 강원도에서 강릉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고 한다. 철원보다도 번화한 도시였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화군은 철원군과 마찬가지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명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지하자원들이 풍부하다. 그런 만큼 식민 통치자의 입장에서 수탈할 물산이 풍부한 이곳은 개발할 가치가 충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금강산 전철을 비롯하여 각종 관공서 등 다양한 편의시설들이 들어섰던 것이다. 물론 김화군은 6.25 전쟁 이전 철원군과 마찬가지로 북한 관할 지역이었다.

생창리는 그런 번화한 지역이었던 김화읍 소속 마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김화군은 ‘철의 삼각지대’로 불리는 꼭지점 중의 하나였다. 그런 만큼 김화군에 속해 있던 생창리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 후 생창리는 지금처럼 양질의 쌀을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의 땅으로 변했다. 사람들도 떠났다. 그러나 정부의 DMZ 인근 마을 조성 사업으로 1970년대 사람들이 생창리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창리는 정부에서 6천 평의 땅을 무상으로 불하한다는 말을 듣고 100가구가 이주하면서 형성된 민북마을이다. 정부의 말을 믿고 처음에 100가구가 들어왔을 때 100가구 모두에게 6천평씩 나누어줄 경작지가 없어서 1천 3백평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땅은 전쟁통에 무너진 건물 잔해로 뒤덮혀 있든지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서 경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삼백평마저도 지금처럼 양질의 철원쌀을 생산할 수 있는 옥토는 아니었단다. 물론 지금처럼 농기계가 잘 발달되어 있던 시절도 아니다. 그들은 호미와 곡괭이 등의 재래식 농기구로 지금의 옥토를 만들었던 것이다. 푸른 꿈을 안고 이주했던 사람 중에는 힘에 겨워 떠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의 철원쌀은 민북마을 주민들이 피땀으로 일구어낸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원 지역에는 생창리 이외에도 많은 민북마을이 있다고 한다. 민북마을은 1959년 정부가 휴전선 인근의 유휴지 개간을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사람들을 모집함으로써 집단 거주하여 형성한 마을이다.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집단 거주하여 만들어진 마을인 만큼, 마을 형성 초기에는 언어와 풍습이 달라 사람들 사이에 갈등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호동화됨으로써 민북마을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기도 한단다. 철원의 또다른 모습이다.

우리가 탐방하려고 하는 생창리생태공원은 일제강점기에 농업 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남대천 상류 지역에 보를 설치함으로써 생긴 습지 공원이다. 용양보습지생태공원인 셈이다. 이 근처에서 백골 부대가 치열한 전투를 했다고 한다. 파괴된 채 잔해만 남아 있는 암정교 출렁다리, 곳곳에 붙어 있는 지뢰 표지판은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는지를 말해준다.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다면 이곳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여느 다른 습지 공원과 다름이 없다. 오늘따라 날씨가 너무 좋다. 익산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미세먼지도 없다.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뭉게뭉게 흰 구름이 호수에 그대로 비친다. 두 개의 하늘이 맞닿아 있는 듯하다. 탐방로 양 옆으로는 이름 모를 나무와 식물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울창한 밀림지대다.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분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청량하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금강산 전철이 지나가는 곳이니 틀림없이 관광객들로 북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습지 공원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조건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지니 말이다.

 1박 2일간의 우리의 DMZ평화여행은 생창리DMZ생태공원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2년 전 사찰 순례 덕분에 잠시 나의 관심 속에 들어왔다 사라졌던 철원이 이번 평화여행으로 나의 관심 속에 확실히 자리잡게 되었다. 강하게 철원에서 한달살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2년 전 나는 민간인 통제구역 밖에서 철원을 봤다. 이때 철원은 전쟁의 상흔을 상기시키는 아픈 지역이었다. 철원은 전쟁을 막기 위하여 또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의 젊음을 허비하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이 서려 있는 미지의 땅이었다. 지금도 철원은 미지의 땅이다. 그러나 희망과 평화를 품고 있는 미지의 땅이다. 전쟁은 아프다. 그러나 시간은 그 전쟁을 선물로 바꾸고 있다. 노동당사가 반공의 상징물에서 폐허미라는 선물을 선사하고 있듯이, 남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산업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즈음, 비무장지대는 자연 생태계의 보물창고라는 선물을 선사하고 있다. 김화를 품고 있는 철원 주민들, 특히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민북마을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연 파괴의 결과, 기후변화 위기를 겪고 있는 전 세계에 철원 주민들은 우리에게 사람이 자연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제2땅굴이 비록 북한이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하여 파놓은 땅굴이지만, 그래서 그 속에 들어가면 섬뜻한 두려움이 몰려오지만, 이것 역시 선물로 바뀔 날을 기대해 본다. 시간이 흘러 남한과 북한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면, 이 땅굴이 지하 터널로 활용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가! 비무장지대의 자연생태계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이 지하 터널을 도로 삼아 남한과 북한 주민들이 평화롭게 왕래할 날을 꿈꾸어 본다.